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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아트스페이스 OA 개관전 [제3지대_Key]



아트스페이스 O.A 개관기념전 [제3지대: Key]

2022. 09. 19. - 2022. 10. 19

기존의 형식과 틀을 거부한다는 의미를 포함한 대안공간은 197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일종의 문화운동으로, 새로운 예술로써의 대안적 실험을 하는 장소의 개념이 강하며, 1990년대 말 국내에 들어온 대안 공간은 미술계의 구조적 문제점에서 독립한다는 취지로 잘 설명됩니다. IMF 이후 국내 미술시장은 경기침체로 인해 상업 갤러리는 기획전 비율보다 대관 비율을 높이면서 작가들은 전시의 기회를 얻기 어려웠고, 공공미술관은 제도적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진입작가, 실험적인 작업을 하는 작가에게 충분한 기회를 줄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문제에서 시작된 대안공간은 당시의 미술계 구조에서 신진작가와 실험적 예술을 위한 지원을 시작했고 우리나라 1, 2세대 대안공간의 시도들은 현재 예술정책들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습니다.

2022년 목포라는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우리는 지역에 뿌리를 두고 성장하고자하는 예술가들의 성장 효용성에 주목합니다. 창작지원금, 전시지원금, 청년예술가 지원 등 다양한 사업명으로 풍부해진 예술가를 위한 지원은 경제적 여유가 없는 청년 예술가들에게 작업을 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함과 동시에 한 예술가로의 성장을 위한 지속가능성, 독립성, 실험성에 대한 한계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몇몇의 기득권, 순환되지 못하는 세대별 예술가들, 협력보다는 활용에 가까운 청년예술가들의 처우와 맞물리는 지역의 시각 예술 생태계의 현실은 청년 예술가들의 성장을 더욱 더 더디게 합니다. 우리는 지역에서 예술가로 살아남기 위하여 국가의 예술정책과 더불어 진입 작가와 청년 예술가들의 실험적 창작, 그것을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아트스페이스 O.A]의 개관은 지역 내에서 대안적 시도이며 이번 개관기념전시를 통해 그 시작을 알리고자 합니다.

아트스페이스 O.A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청년 시각 예술가들의 걸음을 함께 실험하고 응원하기 위해 [아트스페이스 O.A]를 개관합니다. ‘O.A’는 One Step After Step의 약칭으로, 한 발을 내딛을 때 다음으로 걸음을 옮길 수 있음을 뜻합니다. 아트 스페이스 O.A는 국가의 지원을 통해 구축된 예술 공간이 아닙니다. 이 공간은 지역을 기반으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확립해 나아가는 청년 예술가들의 자발적인 의지에 의해 구축 되었으며 앞으로 독립적, 실험적 예술 활동을 지원하고 함께 걷는 예술 공간으로써의 역할을 수행 할 것입니다.

아트스페이스 O.A 개관기념전 [제3지대: Key]

이번 개관기념전시는 그 첫걸음으로써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과 졸업을 앞둔 예비 작가가 바라본 지역 예술 생태계를 다룹니다. 네 명의 작가들은 작품을 통해 지역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 작가로서 ‘무엇을, 어떻게, 왜’에 대하여 끊임없이 자문하고 있습니다.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온통 물음표가 가득한 버섯의 김다현 작품을 시작으로 하얀 소파 위에서 조용히 숨을 고르는 김혜윰 작품, 그리고 유달산을 맨발로 걸으며 발견한 생물들의 사건을 기록한 정민정과 정주은의 공동 작업이 관람객을 맞이하며 관람객으로 하여금 작가들이 직면한 생태계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안내할 것입니다. 아트스페이스 O.A는 이번 [제3지대: Key] 전시를 시작으로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고자하는 작가들과 함께 '무엇을, 어떻게, 왜'에 대한 질문을 이어가고자 합니다.






정민정 [유달산 X-파일] 작업 노트_2022.08.17.~2022.09.08.

이번 [유달산 X-파일] 작업은 2022년 4월 9일부터 7월 29일까지 주은이와 함께 유달산을 맨발로 오르면서 마주한 작은 생물들의 세계를 기록한 것이다. 매일 신고 다니던 양말과 신발을 벗어 한 손에 들고 맨 발바닥으로 땅을 밟았다. 땅 위에 이리저리 박혀있는 돌, 나무들로부터 떨어져 내린 나뭇가지와 잎사귀들, 열매들. 햇볕에 바싹 말라 고슬고슬한 흙을 발바닥으로 받아내고 또 밀어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난생 처음 맨 발로 걸어보는 유달산이 처음에는 막연히 두렵고 설레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거나 벌레가 물지 않을까 하는 불안과 함께 살갗을 땅에 맞대고 걷는 느낌은 어떨지 기대감이 솟구쳤다. 주은이와 함께 산길을 나아가는 동안 우리는 아무 말이 없었다. 매일 만나도 무슨 할 말이 그렇게나 많은지 만나기만 하면 작업이야기,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이야기, 어느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 자연에 대한 이야기, 농경 이야기, 나무와 버섯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고민 등 각자의 일을 마치고 돌아와 5시간이고 6시간이고 쉴 새 없이 쏟아내던 이야기꾼들의 입이 멈추었다. 대신 눈이 바삐 움직였다. 그 시선은 땅에 닿아있었다. 산을 맨 발로 올라본 적이 없는 우리는 막연히 ‘다칠 수 있다’라는 두려움에 입을 멈추고 모든 감각을 발바닥에 집중하고 눈으로 땅을 내려다보며 위험요소를 사전에 방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맨 살과 맞닿은 땅은 우리에게 친절했다. 어쩌다 걸린 돌부리는 내 발을 아프게 하지 않았다. 온 땅 위의 것들ㅡ돌, 나뭇조각, 나무껍질, 나뭇잎, 모래 등 유달산 생물들의 잔재ㅡ은 나를 아프게 하지 않았다. 내 발바닥을 간지럽게도, 따갑게도, 따뜻하게도, 축축하게도 만들었다. 온 신경을 발바닥에 집중하며 걷다보니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사람들이 편안하게 걸을 수 있도록 산길을 덮어 조성된 아스팔트길에는 직조된 돌조각 사이로 얇은 뒷다리가 끼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그 다리를 끊어내려 안간힘을 쓰는 꿀벌이 있었다. 처음에는 꿀벌의 다리가 그 작은 틈 사이에 끼였을 거란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하고 ‘어딘가 다쳤나보다’라고 생각했으나, 이내 그가 다친 것이 아니라 아스팔트 돌 사이에 발이 끼인 것임을 알아차렸다. 그를 도와주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주변에 놓여있던 아주 작은 나뭇가지를 들어 그의 엉덩이를 톡 하고 쳐 주었을 때 그는 쌩-하고 날아오르더니 얼마못가 다시 바닥에 내려왔다. 다시 그가 내려앉은 곳은 아스팔트길이 아닌 볏짚 길이었다. 이 또한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길이었다. 아뿔싸, 꿀벌은 좀 전보다 더 촘촘한 볏짚 틈 사이에 뒷다리가 끼이고 만다. ‘아무래도 다친 벌인가 보다’하며 다시 그의 엉덩이를 톡 쳐주었을 때, 그는 비로소 쌔앵- 하고 먼 하늘로 날아갔다. 그는 다친 것이 아니라 땅에 내려앉을 때마다 인위적으로 직조되어있는 무언가에 발을 끼이고만 것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나는 아스팔트 틈 사이로 벌꿀의 다리가 끼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현장을 직접 마주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었을 일이었다.

이날 나는 ‘사람은 참 이기적이구나.’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유달산의 한 편을 황토색 아스팔트로 덮어 아스팔트길로, 또 한 편은 황토색 볏짚을 케이블타이로 엮고 묶어 볏짚 길로 조성한 구역. 이렇게 조성된 길은 사람들이 지나다니기 편리한 길일 터였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지 않아도 사람들은 흙을 밟고 돌부리를 밟으며 지날 수 있는 길이었다. 이 길은 모든 길이 그러하듯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생물들도 지나는 길이다. 꿀벌이 잠시 내려앉아 쉬어가는 길이고 개미가 지렁이의 사체를 물고서 힘겹게 지나는 길이며 땅에 떨어진 매미가 하늘로 다시 도약하기 위해 일어서는 길이다. 모든 생물들은 이 길을 지날 수 있지만 이 길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사람 이외의 생물이다.

사람이 이기적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사람은 정말 이기적인가?’라는 물음이 떠올랐다. 유달산을 거닐며 보았던 바, 거미는 개미가 가는 길을 배려하며 거미줄을 치지 않는다. 개미는 죽어가는 매미를 지나치지 않는다. 그렇게 자연은 철저하게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살아간다. 그것은 사람 또한 마찬가지리라. 그러나 자연의 것들을 바라보며 다시 저를 보는 것, 마음으로 저 이외의 다른 생물을 품는 것은 오로지 사람뿐이니, 사람 된 도리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언가와 끊임없이 관계를 맺는 일일 것이다. 끊임없이 들여다보고 듣고 느끼며 무언가와 관계를 맺고 나를 포함한 이 모든 것들과 함께 살아가는 일일 것이다.


정주은 [유달산 X-파일] 작가 노트_2022.08.17.~2022.09.08.

유달산 걷기는 처음에는 산책의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가끔 산 정상까지 오를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완경한 산책길을 한 바퀴 돌아보는 것이 우리의 산책 코스였다. 3월 말부터 7월까지 3-4개월간 산을 오르면서 계절마다의 분위기를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는데 4월에는 벚꽃과 수선화가 피고 지는 것을 목격했고 5월에는 삭막한 나무에서 파릇파릇한 새 순이 조금씩 돋아나는 것을 목격했다. 여름에 다다른 5월 중순 즘이 되었을 때는 금세 싱그러운 나뭇잎으로 무성해진 나무와 함께 이전에는 잘 보이지 않던 벌레와 곤충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곤충, 벌레들이 땅 위로 등장하자 우리는 유달산에서 여러 가지 사건들을 목격했다. 어느 날은 애벌레가 땡볕에 놓여 마른 흙을 뒤집어 쓴 채 버둥거리는 것을 보고 우리가 나뭇잎으로 들어 그늘진 곳으로 이동시켜주기도 했고 또 다른 날에는 개미들이 자신의 몸의 몇 배는 되는 죽은 곤충의 사체를 개미굴로 끌고 가려고 시도하는 광경을 목격해 그 모습을 몇 시간 동안 관찰하기도 했다. 7월에는 매미의 사체와 그것을 먹고 있는 개미나 매미의 허물을 다수 목격했다.

나는 유달산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관찰하며 여러 감정을 느낄 수 있었는데, 개미 한마리가 눈앞에 놓인 나뭇가지를 조금 전까지 자신이 끌고 있던 애벌레로 착각하여 한참을 끌고 가는 모습을 보며 답답해하기도 했고 죽은 곤충의 사체를 끌고 가려는 동료 개미의 일을 돕지 않고 곤충의 진액만 먹고 흩어지는 개미의 행동을 보며 비난 섞인 탄식이 나오기도 했다. 내가 마치 이들의 재판관이 된 것처럼 개미들의 행동을 판단해 잘잘못을 가르고 있을 때 생물학자이신 한 교수님이 방송에 나와 개미군집의 특성을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것은 사람들은 개미를 부지런하고 성실한 생명체로 인식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 군집의 30%만 일을 하는 일개미라는 정보였다. 나의 시선에서는 그저 동료를 돕지 않는 영악하고 형벌을 내려야 할 존재로 보여 괘씸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개미도 각자의 존재의 위치와 특성 ,자신의 역할을 본능적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었다. 눈에 띄게 움직이는 곤충과 벌레 말고도 유달산의 생태계 안에서는 떨어지는 풀잎 하나하나도 모두 각자의 역할이 있었다. 말라서 떨어진 나뭇잎은 비가 올 때 개미굴이 침수를 막는 것에 쓰이기도 했고 곤충과 벌레들이 자신의 먹을거리를 자신의 천적으로부터 보호하고 숨길 수 있는 재료이기도 했다. 그늘이 진 곳에서 썩어가는 나무와 썩은 나뭇잎은 햇빛이 들지 않는 곳에서 썩어가고 있었지만 버섯들이 자라나기에는 최고의 장소였다. 또 곤충이 여러 가지 이유로 죽은 후에는 1차적으로 새들이 와서 곤충의 사체를 쪼아 먹었고 남은 사체 조각들은 땅과 나무에 사는 작은 곤충들이 분해해 먹기에 적합한 형태로 부서져 작은 벌레나 곤충의 몫으로 주어졌다. 유달산에서 보낸 4개월의 시간은 의미 없는 때와 쓸모없이 버려지는 것이 없는 조화로운 자연의 생태계 안에서 우리의 존재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김혜윰 [작고 얕은 숨, 끝없는 잠] 작가 노트_2022.07.09.~07.10.

지금까지 나에게 있어서 작업과 그곳에서 나온 작품은 나 자신을 치유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번 작업도 늘 해왔던 것처럼 자가치유의 과정을 만들고 싶었고 현재 나의 마음은 어떤 상태일까? 라고 또 나에게 묻는 것으로 시작했다.

대학교를 재학하던 때보다는 좀 더 단단해진 마음이 상대적 평온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무겁게 누르고 있는 마음속 짐은 항상 동행한다. 그 짐에 대해 다현 작가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번 아웃(Burn out)’ 현상이라는 공통 키워드를 찾았다. 우리는 사람들과 사회에서 밀려오는 복잡하고 거대한 파동에 치이고 저항하는 청년이다. 우리뿐만 아니라 주변에서도 번 아웃으로 멈춰있는 청년들을 흔하게 마주할 수 있다. 입시 제도를 거쳐 대학입학과 졸업 후 그 과정에서 그들은 각자 다른 형상과 패턴으로 번 아웃을 겪는다. 점점 더 가속화되는 주변과 반대로 이들의 시간은 끈적하게 녹아내리고 고여 있다.

이번 작품은 작고 얕은 숨, 끝없는 피로와 잠으로 덮어놓는 불안의 형상이다. 여태껏 해왔던 개인적인 이야기가 아닌 다수의 모습을 담고 싶었고 번 아웃이라는 상태를 마주하며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에 주목해보기로 하였다. 서두르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고 그 동굴 속에서 무사히 잘 나오기를 바라며.

정답지에 나온 답안대로만 외워 써내던 그때는 답이 존재했다. 졸업과 동시에 방생된 우리는 갑자기 마주쳐버린 백지 앞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가장 정확환 답을 빠르게 찍어내는 것만 버릇이 되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꾸만 뭔가를 꾸며내 보여주려고 발버둥 친다. 바르지 않은 자세로 허우적거리다가 힘이 다 빠져버려서 캄캄한 물살에 휩쓸리며 잠만 잔다. 끝없는 잠처럼 느껴진다.


김다현 [gloomy mushroom] 작업노트 2022.05.29.

#우울 #버섯 #수집 #공유 #연결 #위로

사람들은 누구나 우울을 느끼지만 우울함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는 것에는 부정적이다. 나 또한 내가 가진 상처나 우울을 드러내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특히 작품에서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는 ‘배설’이라는 단어가 유독 부정적으로 느껴져서 좀 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배설(우울을 작품으로 드러내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좀 깨지게 된 건 O.A 전시 준비 초창기 때 혜윰 선배의 작품관에 대해 읽고 난 후이다. 사실 지금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배설은 지저분한 행위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고 자신을 보살피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와닿았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는 내가 살면서 주로 느꼈던 감정이자 상태인 우울과 무기력에 대해서 다뤄보고 싶어졌었다.

우울과 무기력을 다양한 시선으로 다뤄 볼 수 있겠지만 나는 내가 경험했던 우울을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느낌으로 표현해보고 싶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갑자기 글을 인식을 못 하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당시에는 그런 증상이 왜 왔던 것 인줄 모르고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었다. 대학교에 와서 가장 친한 친구와 한번 그때 경험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그 대화를 통해 내가 글을 인식 못 했던 증상이 우울과 스트레스로 인해 왔던 경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내 작품을 보는 사람도 내가 내 우울한 증상을 공유하는 것을 통해 몰랐던 자신의 우울함에 대해 알고 위로받는 경험을 할 수 있길 바랐다.

처음 작품을 구상할 때는 일상이 무너져 가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언젠가 넝쿨 식물 중에 다른 식물을 덮어버려서 죽게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어 넝쿨 식물이 사람을 점점 덮어서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점점 무언가를 인식하고 인지하는 능력도 떨어지게 만들다가 나중에는 완전히 지배하는 애니메이션을 만들려고 했었다.

졸업 심사가 끝난 후 본격적으로 작품 제작에 들어가고 나서 이건 내 능력으로 할 수 없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작품 형식을 바꾸거나 뭔가를 바꿔야 했다. 이 순간부터 생각이 복잡해지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내가 갈피를 못 잡고 헤매고 있으니까 같이 전시 준비를 하는 주은 선배랑 민정 선배가 작가 모임 때 옆에서 작업에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많이 해 줬었다. 그중 하나가 자연계에서 볼 수 있는 이중성이었다. 졸업 작품 주제로 사람의 다면성, 이중성에 대해 다루고 있었는데 우울 또한 이중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우울도 마찬가지로 괜찮았다가 안 괜찮았다가 하는 이중성이 있고 자연계에서도 땅에 있어 눈에 안 보이는 씨가 발아해서 보이는 것과 버섯의 포자가 눈에 보이지 않다가 일정한 환경이 갖춰지면 눈에 보이는 버섯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처럼 이중성이 있다. 평소에 내가 식물 키우는 데에도 관심이 많고 졸업 작품에도 식물을 다루고 있으니 연결 시켜 볼 수 있지 않겠냐고 조언해 줬었다.

이 이야기를 들을 당시에는 우울에도 이중성이 있다는 게 크게 와 닿지는 않았다. 나한테 우울은 1년 365일 내내 함께했던 것이라고 생각했었고 실제로 꽤 오랜 시간 동안 그런 느낌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런 느낌을 잘 몰랐었다. 언젠가 디자인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너무 집중도 못 하고 손도 느려서 거의 하루 종일 그걸 잡고 있으니까 자괴감이 들고 ‘내가 이래서 나중에 사회 나가서 한 사람 몫은 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에 휩싸여서 정말 오랜만에 살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작가 모임 때 들었던 이야기들이 떠오르면서 그 이야기들이 어떤 느낌이고 의미였는지 와 닿았다. 버섯이 자라났을 때 기겁하면서 뽑아버려도 시간이 지나고 다시 보면 똑같은 자리에 똑같은 버섯이 자라 있다는 점이 정말 우울과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그 이후부터 버섯이 자라는 과정 = 우울의 이중성에 꽂혀 버섯을 키우고 키우는 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뭔가 버섯나무 토막이랑 사진만 디피하기에는 좀 부족한 감이 없지 않나 싶어 버섯의 종류가 다양한 것처럼 우울의 모습도 다양하다는 이야기로 주변에 있는 버섯이나 산 같은 곳에 갔을 때 보이는 버섯들을 찍고 버섯 실물들을 모으고 다녔다.

여러 가지 버섯들을 모을 때는 혼자서 돌아다니기도 하고 종종 혼자 다니면 놓치는 부분들이 많아서 학과 선배나 후배들이랑 같이 다니기도 했다. 같이 다니는 선배들은 버섯 사진이랑 실물을 수집해서 작업을 하는 거면 버섯을 수집하러 다니는 날짜와 그때 내가 느꼈던 기분들을 함께 기록하는 게 더 작업에 정당성(?)이 생길 것이라고 조언해주기도 했다.

조언을 듣고 버섯을 수집하러 다닐 때 내가 무슨 감정으로 수집을 하러 다니지? 하고 생각을 해 보면 너무 평온한 상태에서 버섯을 수집하러 다녀서 괴리감이 느껴졌다. 나는 버섯으로 우울함을 표현하고 있으니까 버섯을 수집하러 다닐 때도 내가 우울하고 무기력하고 상태가 안 좋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정말 전시 디피를 해야 하는 때가 오고 모아놨던 버섯들과 키우고 있던 버섯들을 전시 공간으로 가져왔다. 막상 가져와서 디피를 하려고 보니까 그때부터 다시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벽에 버섯들을 나열해 두면 되지 않을까 하는 정말 안일한 생각으로 시작했던 했던 작업이었다. 전시 장소의 벽이 콘크리트로 되어 있어 쉽게 물건을 고정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어떻게 고정을 한다고 해도 전반적으로 너무 허술해 보였다. 그리고 이미 뽑아버린 버섯은 수분이 닿으면 검은색 물로 녹아서 사라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주제에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디스플레이 방법과 작업 방식을 약간 수정하였다. 버섯을 수집할 당시의 이야기를 넣는 건 주제가 잘 드러나지 않을 것 같아 주변 사람들의 우울한 이야기를 받아서 만화 형식으로 그리고 버섯 실물을 전시하는 대신 주변에서 찍었던 버섯들을 캐릭터로 바꿔서 그린 후 붙이는 쪽으로 수정하였다.

우울한 이야기를 무겁게 그리면 보는 사람도 우울해질 것 같아 우울한 이야기를 그릴 때 최대한 너무 무거운 분위기가 되지 않도록 이야기의 주인공을 귀여운 버섯 캐릭터로 만들어서 그렸다.

사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받고 만화로 그려 가야 하는 과정이 남아 있기 때문에 작업 노트를 작성하고 있는 지금은 완전히 생각이 마무리 지어지진 않았다. 그저 내가 그린 이야기들을 보고 이야기를 제공해준 사람도, 이 작업을 보고 가게 될 사람도 조금이라도 공감 또는 위로를 얻어갈 수 있길 바란다.


아트스페이스 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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